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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法語

왕정순 시의원 2008. 9. 20. 17:45

 
가을 법어(法語) / 장석주(195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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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법어(法語)’ -장석주 (1954∼ )
태풍 나비 지나간 뒤 쪽빛 하늘이다.
푸새것들 몸에 누른빛이 든다.
여문 봉숭아씨방 터져 흩어지듯
뿔뿔이 나는 새떼를
황토 뭉개진 듯 붉은 하늘이 삼킨다.
대추 열매에 붉은빛 돋고
울안 저녁 푸른빛 속에서
늙은 은행나무는 샛노란 황금비늘을 떨군다.
쇠죽가마에 괸 가을비는
푸른빛 머금은 채 찰랑찰랑 투명한데,
그 위에 가랑잎들 떠 있다.
……몸 뉘일 위도에
완연한 가을이구나!
어두워진 뒤 오래 불 없이 앉아
앞산 쳐다보다가
달의 조도(照度)를 조금 더 올리고
풀벌레의 볼륨은 키운다.
복사뼈 위 살가죽이 자꾸 마른다.
가을이
저 몸의 안쪽으로 깊어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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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한 빛의 잔치다. 온갖 빛이 버무려지는 가을 정취를 은은히 그렸다. 
가을은 모든 지역에 동시에 오는 게 아니다. 위도에 따라 그때가 달라진다!
마지막 연에 이르러서야 몸이 세계에 반응하는 화자의 절제가 기품 있다. 
거의 20년 전 ‘11월’이란 풋풋한 산문을 썼던 시인의 심중은 이제 이런 화사한 
색채 속에서도 그윽하다. <황인숙·시인> 
(중앙 일보 2008.09.19 시가 있는 아침에서)    개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