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박공화국의 `사실`과 `진실`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교수 박효종
'사실'과 '진실'을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실은 그렇지 않다.
양자(兩者)는 엄연히
다르다.
입양된 사실을 숨긴 양부모에게 섭섭함을 토로하는 아이에게 양부모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혹시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그동안 너에게 입양된 사실을 숨긴 것은 그보다 더 큰 진실이 있었기
때문이야.입양을 알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너를 사랑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니?"
불미스러운
일에도 사실과 진실은 여지없이 갈라진다.
시어머니가 동네에서 불미스러운 행실로 여덟 번
조리돌림을 당한 것을 알고 있는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는 "사실은 여덟 번이 아니고 일곱 번"이라며 펄쩍
뛴다.
물론 사실관계가 잘못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진실은 시어머니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바다이야기' 사태를 보더라도 '사실'과 '진실'은 다른 게
명백하다.
청와대는 '진실'보다는 '사실'에 중점을 두고 그 사실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다 보니 느끼는 억울함과 섭섭함이 큰 것
같다.
"사실은 권력게이트가 아닌 정책실패와 정책오류에 불과한데,왜 이처럼 난리냐" 혹은
"대통령의 친인척 연루 사실이 밝혀진 것도 아닌데 왜 대통령이 나서서 사과해야 하느냐" 하는 등등의 퉁명스러운 반응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야속함만 토로한다면,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처사다.
대통령의 친인척 연계가 아직 '사실'로 드러나진 않았지만,사람들은 도박공화국의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통치패러다임을 바꾸겠다며 삶의 현장을 직접 가서
보고 살피는 '현장정치'는 소홀히 하고 인터넷 소통(疏通)을 중시하는 '인터넷 정치'를 강조하다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단조차 알지 못하는 결과가
초래됐으니,이번 사태의 진실은 참여정부의 무능함과 직무유기가 아니겠는가.
또 유달리
약자보호를 강조하고 그런 관점에서 양극화 해소를 국정의 우선순위로 삼았는데,막상 서민층과 빈민들의 살림살이를 거덜내는 정책을 시행하고도 그
실체를 몰랐다면,아마추어 정권인 것이다.
국민들로서는 참여정부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쪽박을 깼다는 분노와 비난의 실체를 스스로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기는커녕,왜 느닷없이
"도둑맞으려니 개도 짓지 않는다"는 면책용 발언을 했을까.
대통령이 절감하는 곤혹스러움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동안 대통령으로서는 '아마추어 정치'를 했다는 비난은 받았을는지
모르나,권력형 비리없이 깨끗하게 살아왔고 또 친인척 관리도 보란 듯이 잘해왔는데,이런 대형사고가 발생했으니 기가 막힐 법도
하다.
따라서 말하자면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현상'에 직면한
것이다.
두 가지의 인지적 요소들이 긴장을 이루어 괴로움을 주는 '인지부조화 현상'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것을 줄이고자 노력한다.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이나 높은
데서 일하는 인부들이 안전모를 쓰지 않는 경향도 안전불감증 때문이라기 보다는 인지부조화 현상을 줄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자신들이 매우 위험한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기 싫어하기 때문에
일부러 쓰지 않는 것이다.
결국 대통령도 인지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한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바다이야기'에 '개이야기'를 끌어들인 것일까.
개가 짖지
않았다는 것이 도둑이 든 것을 몰랐다는 점에 한 가닥 위안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정책임자라면 인지부조화 해소용 '핑계거리'를 대기 보다는 '대국민
사과'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개이야기'보다 '소이야기'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가 짖지 않아 외양간의 소를 잃었다고 해도 다음을 위해 외양간은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