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사기극에 담긴 사회상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이재열)
상품 가격이 올라가면 수요가 줄고, 가격이 내려가면 수요가 늘어 많이 팔린다. 이것이 경제학 교과서가 가르치는 수요공급의 법칙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가격이 비쌀수록 더 잘 팔리는 물건도 많다. 명품 열기도 한국만큼 유난한 곳이 없다. 파리의 샹젤리제, 런던의 슬로운 스트리트, 보스턴의 뉴베리 스트리트 못지않게 청담동 거리는 명품점들로 가득하다.
물건의 용도나 쓰임새보다는 자신의 지위나 기호를 드러내는 소비가 많아졌다. 그래서 진짜 명품을 사기 어려운 사람들은 짝퉁이라도 사야 한다. '평범해진 명품'에 입맛을 잃은 사람들은 희귀하고 비싼 새로운 브랜드를 찾아 자신을 차별화한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서 제작한 원가 8만원짜리 시계를 수천만원에서 무려 1억원 가까운 값에 유력 정치인 부인, 부유층과 연예인 등에게 팔아치운 희대의 사기 사건까지 등장하게 됐다. 이것은 말 그대로 속물효과(snob effect)라 할 수 있다. 피해자들이 원한 것은 시계 자체가 아니라 전 세계에 몇 안 되는 억대 시계클럽의 회원권이었기 때문이다.
대규모 연예인을 동원한 론칭 쇼에다 국적 세탁까지 한 이 놀라운 사기의 주역은 적어도 100여 년 전 베블런이 쓴 '유한계급론'의 통찰력을 나름대로 응용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양반전'을 쓴 박지원의 해학과 위트를 의도치 않게 재현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근현대 한국사회의 깊숙한 내면을 까발리는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있다.
베블런은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사치성 소비를 유한계급, 특히 졸부의 특성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래서 가격이 비쌀수록 잘 팔리는 물건을 베블런 재화라고 부른다. 유럽의 전통적 귀족들은 각종 작위(爵位)와 문장(紋章), 그리고 사냥과 스포츠 등의 과시적 여가로 자신의 지위를 드러낼 수 있었던 반면, 그러한 상징자본을 갖지 못한 미국의 신흥 졸부들이 가장 쉽게 재력을 과시할 수 있는 방법은 소비를 통해서였다. 비싼 보석과 수영장 딸린 대저택, 캐딜락과 요트는 확실하게 지위를 드러내는 소비 대상이 됐다.
이번 사기극은 지배층의 부패와 타락으로 성리학적 지배의 정당성이 무너진 뒤 온 나라가 양반 되기에 열중한 19세기 조선사회의 흔적이 현대 한국사회에 짙게 배어 있음을 보여준다. 품격 있는 생활양식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대표되는 도덕적 정당성으로 자신의 독자 브랜드를 만들지 못하는 한 대한민국 상류층은 천박한 과시적 소비를 통해 그 자리를 넘보는 졸부와 신흥 권력자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할 수단을 갖지 못할 것이다. 계층 간 구별이 아직 선명하지 않은 경쟁사회일수록 상류층의 과(誇)소비는 중하층의 과(過)소비와 짝퉁의 범람으로 이어진다.
내면적 효용과 가치가 무시되고, 외형적 가격이 지배하는 지위 체계에서는 시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예단 값에 따라 매겨진다. 그러니 과년한 딸을 둔 부모의 한숨만 깊어진다. 대학과 전공의 정체성이 수능점수에 따라 갈리는 풍토에서 학벌의 폐해를 막을 수 없다. 기초학문 위기론이나 공대 위기론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과시적인 소비가 어디 철없는 몇몇 연예인들만의 일이랴. 재정자립도는 바닥을 헤매는데도 초호화 청사를 짓는 데 열중하고, 엄청난 규모의 컨벤션 시설이나 국제공항을 만들어 놀리고 있는 지방정부들은 어떠한가. 국방예산에 대한 냉정한 주판알 튕기기 없이 전시작전통제권 조기 환수를 외쳐대며 '자주 이념'을 과시하는 중앙정부와 청와대는 또한 어떠한가.
평양의 짓다 만 105층 류경호텔이 증언하듯, 능력을 넘어선 과시는 체제 부담만 늘린다. 그래서 인플레된 '명목 가격' 대신 '효용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차분하고 합리적인 소비는 어린아이부터 나라님까지 모두가 배워야 할 덕목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이재열)
상품 가격이 올라가면 수요가 줄고, 가격이 내려가면 수요가 늘어 많이 팔린다. 이것이 경제학 교과서가 가르치는 수요공급의 법칙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가격이 비쌀수록 더 잘 팔리는 물건도 많다. 명품 열기도 한국만큼 유난한 곳이 없다. 파리의 샹젤리제, 런던의 슬로운 스트리트, 보스턴의 뉴베리 스트리트 못지않게 청담동 거리는 명품점들로 가득하다.
물건의 용도나 쓰임새보다는 자신의 지위나 기호를 드러내는 소비가 많아졌다. 그래서 진짜 명품을 사기 어려운 사람들은 짝퉁이라도 사야 한다. '평범해진 명품'에 입맛을 잃은 사람들은 희귀하고 비싼 새로운 브랜드를 찾아 자신을 차별화한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서 제작한 원가 8만원짜리 시계를 수천만원에서 무려 1억원 가까운 값에 유력 정치인 부인, 부유층과 연예인 등에게 팔아치운 희대의 사기 사건까지 등장하게 됐다. 이것은 말 그대로 속물효과(snob effect)라 할 수 있다. 피해자들이 원한 것은 시계 자체가 아니라 전 세계에 몇 안 되는 억대 시계클럽의 회원권이었기 때문이다.
대규모 연예인을 동원한 론칭 쇼에다 국적 세탁까지 한 이 놀라운 사기의 주역은 적어도 100여 년 전 베블런이 쓴 '유한계급론'의 통찰력을 나름대로 응용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양반전'을 쓴 박지원의 해학과 위트를 의도치 않게 재현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근현대 한국사회의 깊숙한 내면을 까발리는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있다.
베블런은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사치성 소비를 유한계급, 특히 졸부의 특성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래서 가격이 비쌀수록 잘 팔리는 물건을 베블런 재화라고 부른다. 유럽의 전통적 귀족들은 각종 작위(爵位)와 문장(紋章), 그리고 사냥과 스포츠 등의 과시적 여가로 자신의 지위를 드러낼 수 있었던 반면, 그러한 상징자본을 갖지 못한 미국의 신흥 졸부들이 가장 쉽게 재력을 과시할 수 있는 방법은 소비를 통해서였다. 비싼 보석과 수영장 딸린 대저택, 캐딜락과 요트는 확실하게 지위를 드러내는 소비 대상이 됐다.
이번 사기극은 지배층의 부패와 타락으로 성리학적 지배의 정당성이 무너진 뒤 온 나라가 양반 되기에 열중한 19세기 조선사회의 흔적이 현대 한국사회에 짙게 배어 있음을 보여준다. 품격 있는 생활양식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대표되는 도덕적 정당성으로 자신의 독자 브랜드를 만들지 못하는 한 대한민국 상류층은 천박한 과시적 소비를 통해 그 자리를 넘보는 졸부와 신흥 권력자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할 수단을 갖지 못할 것이다. 계층 간 구별이 아직 선명하지 않은 경쟁사회일수록 상류층의 과(誇)소비는 중하층의 과(過)소비와 짝퉁의 범람으로 이어진다.
내면적 효용과 가치가 무시되고, 외형적 가격이 지배하는 지위 체계에서는 시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예단 값에 따라 매겨진다. 그러니 과년한 딸을 둔 부모의 한숨만 깊어진다. 대학과 전공의 정체성이 수능점수에 따라 갈리는 풍토에서 학벌의 폐해를 막을 수 없다. 기초학문 위기론이나 공대 위기론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과시적인 소비가 어디 철없는 몇몇 연예인들만의 일이랴. 재정자립도는 바닥을 헤매는데도 초호화 청사를 짓는 데 열중하고, 엄청난 규모의 컨벤션 시설이나 국제공항을 만들어 놀리고 있는 지방정부들은 어떠한가. 국방예산에 대한 냉정한 주판알 튕기기 없이 전시작전통제권 조기 환수를 외쳐대며 '자주 이념'을 과시하는 중앙정부와 청와대는 또한 어떠한가.
평양의 짓다 만 105층 류경호텔이 증언하듯, 능력을 넘어선 과시는 체제 부담만 늘린다. 그래서 인플레된 '명목 가격' 대신 '효용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차분하고 합리적인 소비는 어린아이부터 나라님까지 모두가 배워야 할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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