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의이모저모]

관악구의 지명 유래

왕정순 시의원 2006. 11. 30. 23:22

신림

 

신림리는 본시 서원리, 신림리, 난곡리로 나뉘어졌으나 1911. 4. 27일 신림리로 통합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자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신림동으로 되었다. 신림리란 마을은 과낙산 기슭이어서 그 일대에 숲이 무성하다 하여 생긴 이름으로 현재 14개의 행정동으로 되어 있다.

복은말

보그니말 이라고 하는데 현재의 신림2동 108번지 일대로 옛날 이 마을에 돈 많은 사람이 살고 있어 복이 숨어 있는 마을(福陰村)이라는데서 유래하였다.


탑골마을

지하철 낙성대 입구역에서 낙성대까지 인헌초등학교 뒷편으로 자연부락이 형성되었는데 이곳 동네 이름을 탑골이라 불렀다.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로 장군의 생가터는 성역화 되었으나 탑골마을은 주거지로 되었다.


양지마을

광해군 7년(1615년) 좌부승지 윤길이 폐비를 반대하여 광해군의 진노를 사 지금의 신림6동 지역으로 피신하여 정착하였고 둘째아들이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성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인조임금은 윤길에게 관직에 나와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나오지 않아 인조임금이 윤길을 찾아 행차하였을 때 양산을 쓰고 행차하였다 하여 양지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서원말

지금의 신림사거리 일대에 있던 마을로 관악구에서 제일먼저 시가화된 지역으로 이곳에 서원정의 정자가 있어 강감찬 장군이 송도(개성)를 왕래할 때 자주 들렸다는 고사에서유래되었다.


합 실

신림10동 335, 336번지 주변 일대로 지형이 큰 조개모양을 하고 있어 합곡이라 적었던 것을 소리와 뜻을 옮겨 합실이라고 하였다.


난 곡

유래가 분명치 않으나 강홍립 장군이 유배되어 은거할 때 난초를 많이 길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은천길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 장군이 어린시절 활쏘기, 말타기 등의 무예를 연마하던 곳이라 하여 장군의 어린시절 이름인 은천(殷川)을 붙여 은천길로 명명되었다.


자하골

서울대 부지로 편입된 이곳은 의성 김씨가 수백년간 터전을 닦아 온 곳으로 조선 말 시 서 화로 이름을 떨친 신위 선생의 아호인 자하에서 유래되었다.


살피재 고개

옛날 농로로 사용되었으나 산적과 여우의 출현으로 통행인에게는 무서운 고개로 어원은 고개를 넘을 때 좌우를 살펴보고 넘으라는 것인지, 고개는 높고 험한데 서민생활은 고달프고 어려움이 많아 고생스럽고 힘들어 슬프다는 의미인지는 분명치 않다.

봉천

봉천은 관악산 근처의 마을로 관악산이 험하고 높아 마치 하늘을 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서 이름을 삼았다고 합니다. 현재 12개의 행정동으로 되어 있다.

당곡

봉천1동 북부 714번지 일대 마을로 당골이라고도 불리었다. 지금의 당곡초등학교와 당곡시장의 뒷편이다. 옛날에 관악지역에서 가장 큰 마을로 전주 이씨가 많았다고 한다. 당곡이라는 이름은 예전에 이곳이 골짜기였으며 이 골짜기에 제당을 짓고 무당이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호리목
봉천5동에서 봉천9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현대시장 일대다. 지형이 호리병처럼 오목하게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에서 상도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능고개라 하였다. 상도동을 넘어서면 양녕대군 묘가 있기 때문이다.

화다리
봉천동 963번지 주변에 활터가 있었고 그 활터를 가기 위한 조그마한 다리가 있어 그 다리를 화다리로 불렀다. 본래의 명칭은 활다리였으나 구전되면서 화다리로 변칭되었다고 하며, 이곳에 마을주민들이 모여 활쏘기 등의 놀이로 화합과 협동정신을 다졌다. 현재는 택지개발로 사라지고 없다.

원당
봉천6동 낙성대역에서 장미원 아파트를 지나 사당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부근의 마을로서 원당이라고 하였다. 예전에 사당이 많이 있었다 하여 사당동이라고 칭하였고 언당은 사당 웃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청능말
봉천4동 청룡산 밑에 있는데 지금의 청룡시장 부근이다. 옛날에 능이 있었다고 하며, 강감찬 장군이 말을 타고 이 마을 뒷산을 지나다가 유달리 푸른 것을 보고 능자리로 좋은 곳이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까치고개
지금 남부순환로의 봉천동과 남형동 사이 고개로서 옛날 이곳에 수목이 우거져 까치가 많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작현, 가추개라고도 한다.

쑥고개
봉천8동에서 신림2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숯을 많이 구웠는데 이에 따라 숯고개라 불리우다 쑥고개로 변했다.


남현

원래는 사당동이었지만 관악구에서 동작구를 분할하면서 사당1동의 관악지역을 남현동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남쪽에 있는 고개마을이라는 뜻으로 고개는 남태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승방벌

남현동 관음사 아래에 있던 마을 이름 또는 들 이름이다. 남현동의 작은 부락으로서 본래 남태령 가까이에 있던 남태령과 심방뜰이 있었으며 큰 마음도 아니고 몇 집이 사는 작은 마을이다.

남태령
옛날부터 여우고개라고 불려져 왔으나 조선시대 정조가 지극한 효성으로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능을 참배하러 행차하던 중 과천현 이방에게 고개 이름을 물은 즉 "서울에서 남쪽으로 맨 처음 큰 고개이기에 남태령이다"라고 아뢴 것이 현재의 고개 이름이 되었다